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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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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산당 선언》은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48년에 발표한 선언문으로, 공산주의의 기본 원리를 담고 있다. 정의동맹의 요청으로 작성되었으며, 역사적 유물론에 기반하여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투쟁을 분석하고,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해야 함을 주장한다. 《공산당 선언》은 19세기 이후 전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이 선언은 폭력 혁명 옹호, 사유 재산 폐지 등에 대한 비판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늘날까지도 사회, 경제, 정치 분야에서 중요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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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 [서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독일어 초판
독일어 초판
제목공산당 선언
원제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저자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번역자사무엘 무어
언어독일어
장르철학
출판일1848년 2월 21일
국가영국
형태소책자
페이지 수23 페이지
위키문헌공산당 선언
관련 항목
관련 이념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
작품공산당 선언
경제학 비판
자본론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경제학 비판 요강
독일 이데올로기
1844년의 경제철학 수고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사회 과학마르크스의 소외론
부르주아지
상부 구조
계급 의식
코모디티 페티시즘
공산주의
사회주의
착취
이데올로기
프롤레타리아트
물상화
문화 헤게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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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경제적 결정론
노동력
가치 법칙
생산 수단
생산 양식
생산력
잉여 노동
잉여 가치
전형 문제
임노동
빈궁화
역사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유물사관
역사적 결정론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계급 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본의 본원적 축적
프롤레타리아 혁명
국제주의
세계 혁명론
무정부 공산주의
철학마르크스주의 철학
유물 변증법
소비에트 연방의 철학
정통 마르크스주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적 자연 철학
마르크스주의적 인본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서구 마르크스주의
분석적 마르크스주의
자유지상주의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적 지리학
마르크스주의 문예 비평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신 마르크스주의
초기 마르크스
인물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로자 룩셈부르크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레프 트로츠키
마오쩌둥
프랑크푸르트 학파
루이 알튀세르
루카치 죄르지
카를 코르쉬
안토니오 그람시
안톤 파네쾨크
기 드보르
목록
비판마르크스주의 비판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비판

2. 역사적 배경

1848년 2월 21일, 카를 샤퍼의 교열을 거쳐 런던에서 《공산당 선언》이 처음 출판되었다. 당시 저자명은 공산주의자동맹의 방침에 따라 붙어 있지 않았다. 이 문서에는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상뿐만 아니라, 카를 샤퍼, 빌헬름 바이트링 등 공산주의자동맹 간부들과 직인 혁명가들의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공산당 선언》의 서문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레망어, 덴마크어판 번역 출간이 임박하였다고 언급하였지만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848년스웨덴어판, 1850년영어판이 출간되었으나 이 두 판은 현존하지 않는다. 《공산당 선언》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대대적으로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1871년 이후이며,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전에는 이미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당 선언》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전 세계에 퍼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미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는 강령이라기보다는 정치사회를 공부하기 위한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대한민국에서 출판된 번역본 또는 해석본으로는 《공산당 선언》(남경태 옮김, 백산서당),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강유원, 뿌리와이파리),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운동 공산주의 선언》(박찬종, 아이세움) 등이 있다.

《공산당 선언》 표지

2. 1. 정의자동맹 결성과 초기 활동

정의자동맹(별칭: 의인동맹)은 1836년 파리에서 망명독일인들을 중심으로 탄생한 조직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논문 『독일에서의 사회주의』에서 정의자동맹이 프랑스혁명가인 프랑수아 노엘 바부프의 유토피아공산주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재화 전체를 공유하고 비밀결사적인 색채가 짙었다고 회고했다.

엥겔스의 또 다른 회고록 『공산주의자동맹의 역사에 대하여』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후 이 조직과 접촉했고, 동맹의 수뇌부 또한 전 유럽에 동맹원을 가진 조직으로 발전하면서 비밀결사적, 바부프적 공산주의 결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동맹의 수뇌부 간부(구체적으로 카를 샤퍼)는 바이트링파에 저항하기 위해 당시 고립 상태에 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제휴하기로 결정했다. 샤퍼는 마르크스에게 가입을 권유하고, 동맹의 위기를 극복할 이론적 선언을 집필하도록 요청했다(1847년 가을).

1847년 6월에 열린 공산주의자동맹 제1차 대회에서는 『공산주의의 신조표명』(「Kommunistisches Glaubensbekenntnis」)이 잠정적인 강령 초안으로 채택되었다. 『공산주의의 신조표명』은 전문이 엥겔스에 의해 쓰여졌으며, 서기 빌헬름 볼프()와 의장 샤퍼의 서명이 있다.

2. 2.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합류

1847년 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정의동맹에 가입했고, 그들의 "비판적 공산주의" 사상은 곧 동맹 회원들을 설득했다. 1847년 6월 2일부터 9일까지 열린 제1차 대회에서 동맹은 엥겔스에게 "신념 선언" 초안 작성을 맡겼지만, 이러한 문서는 개방적이고 비대항적인 조직에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졌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엥겔스는 동맹의 강령을 상세히 설명하는 "공산주의의 신조표명"을 작성했다. 몇 달 후인 10월, 엥겔스는 파리 지부에 도착했는데, 모세 헤스가 공산주의 동맹을 위한 부적절한 선언문을 작성했음을 알게 되었다. 헤스가 없는 상황에서 엥겔스는 이 선언문을 심하게 비판하고, 나머지 동맹원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선언문 초안 작성을 맡았다. 이것이 "신조보다는 시험 문제에 가까운" "공산주의의 원리 초안"이 되었다.[1]

정의자동맹(별칭: 의인동맹)은 1836년 파리에서 탄생한 망명 독일인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다. 엥겔스는 『독일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논문에서 정의자동맹이 프랑스혁명가인 프랑수아 노엘 바부프 이후의 유토피아적인 공산주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재화 전체를 공유하는 것과 비밀결사적인 색채가 짙었다는 점을 회고하고 있다.

엥겔스의 회고록 『공산주의자동맹의 역사에 대하여』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조직에 접촉하였고, 동맹 수뇌부도 전 유럽에 동맹원을 가진 조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비밀결사적·바부프적인 공산주의 결사로부터의 탈피를 모색하고 있었다. 동맹 수뇌부 간부(카를 샤퍼)는 바이트링파에 저항하기 위해 당시 고립 상황에 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제휴하기로 결정했다. 샤퍼는 마르크스에게 가입을 권유하고, 동맹의 위기적 상황을 타개할 이론적 선언을 집필하도록 요청했다(1847년 가을). 1847년 6월에 열린 공산주의자동맹 제1차 대회에서는 『공산주의의 신조표명』이 잠정적인 강령 초안으로 채택되었다. 『공산주의의 신조표명』은 엥겔스가 작성했으며, 빌헬름 볼프와 샤퍼의 서명이 있다.

『공산주의의 신조표명』 초안은 22개의 문답 형식으로 쓰여졌지만, 동맹의 브뤼셀 분파에서도 찬성을 얻지 못했다. 모제스 헤스는 위 초안의 수정안을 제출했으나, 엥겔스는 이를 철저히 비판하고 동맹으로부터 새로운 초안 작성을 일임받았다. 엥겔스는 10월 하순부터 11월에 걸쳐 문답 형식의 초안(『공산주의의 원리』)을 작성했다. 이전의 『공산주의의 신조표명』 초안이 22개의 문답 형식으로 쓰여진 데 반해, 『공산주의의 원리』는 25개의 문답으로 되어 있다.

2. 3. 공산주의자동맹으로의 전환

정의자동맹은 1836년 파리에서 망명독일인들을 중심으로 탄생한 조직이다. 프랑수아 노엘 바부프의 영향을 받은 유토피아공산주의 전통을 따랐으며, 재산 공유와 비밀결사적인 성격을 띠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의자동맹은 전 유럽으로 조직을 확장했고, 이 과정에서 기존의 비밀결사적, 바부프주의적 공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카를 샤퍼를 비롯한 동맹 지도부는 빌헬름 바이트링 파에 맞서기 위해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협력을 제안했다. 샤퍼는 1847년 가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동맹 가입을 권유하고, 동맹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 선언 작성을 요청했다.

1847년 6월, 공산주의자동맹 제1차 대회에서 엥겔스가 작성한 『공산주의의 신조표명』이 임시 강령 초안으로 채택되었다. 이 초안은 22개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되었으나, 브뤼셀 지부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모제스 헤스는 수정안을 제시했지만, 엥겔스는 이를 비판하고 동맹으로부터 새로운 초안 작성을 위임받았다.

엥겔스는 1847년 10월 말부터 11월에 걸쳐 『공산주의의 원리』라는 새로운 초안을 작성했다. 이 초안은 이전의 『공산주의의 신조표명』보다 늘어난 25개의 문답으로 구성되었다.

1847년 11월 29일부터 12월 8일까지 런던에서 열린 제2차 대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동맹의 새로운 강령 작성을 논의했다. 엥겔스는 1847년 11월 23일자 편지에서 마르크스에게 문답 형식을 버리고 '공산주의자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할 것을 제안했다. 동맹은 1847년 11월의 조직 재편 대회에서 채택한 규약에서 "당의 이름으로 선언을 발표한다"고 명시했다.

2. 4. 제2차 대회와 선언 집필

1847년 11월 29일부터 12월 8일까지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 제2차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마르크스엥겔스는 동맹의 새로운 선언문 작성을 위임받았다.[1] 엥겔스는 대회 직전인 11월 23일,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느 정도의 역사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교리 문답 형식이 아닌 선언문 형식으로 작성할 것을 제안했다.[2]

대회에서 마르크스는 격렬한 논쟁 끝에 자신의 강령에 대한 다수결을 확보했고,[1] 엥겔스와 함께 선언문 작성을 위임받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브뤼셀로 돌아온 후 집필을 지연했고, 정치 경제학 강의, 기사 작성, 자유 무역 연설 등 다른 활동에 시간을 보냈다. 이에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는 1848년 1월 24일 또는 26일에 마르크스에게 최후통첩을 보내 2월 1일까지 원고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2]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초고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며 마르크스가 마감 기한의 압박 속에서 서둘러 집필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2] 엥겔스는 공동 저자로 인정받았지만, 최종 초고는 마르크스가 작성했다.[2]

2. 5. 공산당 선언의 출판

《공산당 선언》은 1848년 2월 런던에서 익명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레망어, 덴마크어판 번역 출간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1848년에는 스웨덴어판, 1850년에는 영어판이 출간되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공산당 선언》이 본격적으로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1871년 이후이며,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전에는 이미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1870년대 초, 『공산당 선언』과 그 저자들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에릭 홉스봄은 그 이유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 첫째, 카를 마르크스가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 둘째, 마르크스가 1871년 파리 코뮌을 지지하여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당국으로부터는 악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 셋째, 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지도자들의 반역 재판에서 검찰이 증거로 『공산당 선언』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독일에서 합법적으로 출판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872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독일어판을 출판하면서 초판 발행 이후 25년 동안 시대에 뒤떨어진 부분들이 있음을 밝히는 서문을 썼다. 이 판은 제목이 『공산당 선언』(Das Kommunistische Manifest)으로 축약된 최초의 판이었으며, 이후 판본들의 기반이 되었다. 1871년부터 1873년 사이에는 6개 언어로 9개 이상의 판본이 출판되었고, 1871년 12월 30일에는 뉴욕시의 『우드헐 앤 클래플린 위클리』에서 처음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었다.[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당 선언》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 냉전 시기에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널리 읽혔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미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는 강령이라기보다는 정치사회를 공부하기 위한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40년 동안 유럽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사회민주당이 부상함에 따라, 『공산당 선언』도 30개 언어로 수백 개의 판본이 출판되면서 함께 부상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82년 제네바에서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번역한 러시아어판을 위해 새로운 서문을 썼다. 1883년 마르크스가 사망한 후, 엥겔스는 1888년부터 1893년까지 5개 판본에 대한 서문을 제공했다. 여기에는 사무엘 무어가 번역하고 엥겔스가 승인한 1888년 영어판도 포함되어 있으며, 엥겔스는 본문 전체에 주석을 달았다. 이것은 그 이후로 표준 영어판으로 사용되어 왔다.[8]

출판된 판본의 수를 기준으로 볼 때, 주요 영향력 지역은 동쪽의 러시아에서 서쪽의 프랑스까지 이어지는 유럽의 "중앙 지역"이었다. 반면 이 책은 남서부와 남동유럽의 정치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북부에서는 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이외 지역에서는 중국어일본어 번역본이 출판되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어 판본이 출판되었다. 이 책의 첫 번째 중국어판은 1905년 러시아 혁명 후 통맹회 신문에서 주지신이 번역했다.[9]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하면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마르크스주의에 따라 설립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소련 공산당의 지배 하에 있는 일당 국가였으며, 당원들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고전 작품을 읽어야 했다. 따라서 『공산당 선언』과 같은 작품은 당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품을 널리 보급하는 것은 중요한 정책 목표가 되었고, 소련 공산당은 이를 위한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작품들은 대규모로 출판되었고, 저렴한 판본들이 전 세계 여러 언어로 출판되었다. 1932년 미국 공산당과 영국 공산당은 영어로 발행된 가장 큰 대량 판본을 위해 수십만 부의 저렴한 판본을 인쇄했다. 1948년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반 출판사들도 『공산당 선언』을 대량으로 인쇄했다. 총 판매량은 5억 부로 추산되며, 역대 베스트셀러 4권 중 하나이다.[10]

1990년대 소련 블록의 붕괴 이후에도 『공산당 선언』은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다. 에릭 홉스봄은 "검열이 없는 국가에서는 좋은 서점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 좋은 도서관은 물론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든지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98년 150주년을 맞아 언론과 학계의 관심이 다시 쏟아졌고, 학자들의 서문이 붙은 새로운 판본들이 출판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공산당 선언》(남경태 옮김, 백산서당),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강유원, 뿌리와이파리),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운동 공산주의 선언》(박찬종, 아이세움) 등이 출판되었다.

3. 구성 및 내용

《공산당 선언》은 머리글과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머리말
  • 제1장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 제2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 제3장 사회주의적 그리고 공산주의적 문헌
  • * 제1절 반동적 사회주의
  • ** a. 봉건적 사회주의
  • ** b.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
  • ** c. 독일 사회주의 또는 “진정한” 사회주의
  • * 제2절 보수적 사회주의 또는 부르주아 사회주의
  • * 제3절 비판적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 제4장 여러 반대당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


각 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장'''에서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발생 과정, 자본주의적 착취의 본질, 자본주의의 모순과 멸망의 불가피성을 설명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대립에 기초한 피착취계급과 착취계급의 계급 투쟁이 인류 역사의 기본 내용이며 사회 발전의 추동력이라 주장했다.
  • '''제2장'''에서는 공산주의 운동의 목적과 성격을 규명한다. 프롤레타리아 주도의 공산사회를 만드는 것이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최고 목적이라고 밝혔다.
  • '''제3장'''에서는 기독교 사회주의, 유토피아 사회주의 등 기존의 사이비적 사회주의 조류들을 비판하였다.
  • '''제4장'''에서는 각국 공산당의 혁명 전략과 국제적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로 끝을 맺는다.

3. 1. 서문

"하나의 유령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구절과 함께, 이후 역사적 정치적 수사에 곧잘 인용되곤 했다.[47]

주요 문구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인간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부르주아지는 적나라한 이해관계, 무정한 현금지불이외에 인간들 사이에 다른 어떤관계도 남겨놓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존엄을 교환가치로 녹여 버렸고, 인간의 자유를 단 하나의 파렴치한 상거래의 자유로 대체했다"
"부르주아계급은 가족관계조차 감상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순전히 금전관계로 만들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유란 상거래의 자유, 판매와 구매의 자유일 뿐이다"
"부르주아지가 봉건제를 무너뜨릴때 사용했던 무기가 이제 그 자신을 겨누게 되었다. 그 무기를 휘두를 노동자 계급을 낳았다"
"부르주아계급이 성장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도 성장한다"
"노동자는 분업과 기계화로 말미암아 이제 단순한 도구나 부품이 되었고 매시간 감독하는 관리자, 사용주, 부르주아, 그리고 그 국가의 노예가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싫든 좋든 촉진시키지 않을 수 없는 산업의 발달은 노동자를 고립시키지만 동시에 연합을 통해 그들을 혁명세력으로 만든다. 이리하여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들을 양성해 낸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피할 수 없다"
"이제까지의 소유(관계)를 폐지하는 것이 공산주의가 처음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지는 봉건적 소유제를 완전히 폐지시켰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을 독점했다. 해서 사적소유를 폐지하고 박탈한 것은 부르주아지이다. 대다수의 노동자계급은 노동하고도 소유하지 못했고 부르주아지는 노동않고 소유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누구에게도 생산물을 취득할 힘을 빼앗지 않으며 다만 이런 취득을 통해 타인의 노동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힘을 박탈할뿐이다"
"사적 소유를 철폐하면 그 순간, 사회는 게으름이 만연할 거라 비난한다. 그렇다면 진작에 부르주아지체제는 일순간에 몰락했어야 했다. 대다수는 소유하지 못하니까."
"당신들의 법과 사상은 부르주아지의 생산체제와 소유관계의 부산물이고 지배수단과 도구에 불과하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국가를 장악하기 전까지는 그 자신이 민족적이다"
"한 시대의 지배사상은 늘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노동계급 혁명의 첫걸음은 노동계급이 지배력을 장악해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사회의 생산수단을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귀속시킨다"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획득한다면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공동)체가 등장할 것이다"[47]
"공산주의자는 모든 나라 민주주의 정당들의 단결을 위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들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공산주의는 자신들의 목적이 기존의 모든 사회 질서를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부르주아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은 것이라곤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48]



《공산당 선언》 서두의 유명한 한 문장인 “유럽에 유령이 출몰한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다”는 로렌츠 폰 슈타인의 저서 《오늘날 프랑스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1842년) 중 프랑스 공산주의에 관한 글과 매우 유사하다.

3. 2. 제1장: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제1장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발생 과정, 자본주의적 착취의 본질, 자본주의의 모순과 멸망의 불가피성을 설명한다.[3]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대립에 기초한 피착취계급과 착취계급의 계급 투쟁이 인류 역사의 기본 내용이며 사회 발전의 추동력이라 주장했다.

1848년 3월 혁명 당시 베를린의 한 장면


마르크스는 1장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이룬 막대한 업적을 역설적으로 찬양했지만, 공산당 선언이 쓰여진 시점에서 부르주아는 "명계에서 불러낸 마물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 마법사"와 같이 자본의 노예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지배 계급도 부르주아지가 아닌 새롭게 떠오른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역이 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제1장은 부르주아지 시대(이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아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가 생산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서술하고, 현대는 생산력생산관계모순이 격화된 사회 혁명의 시대이며,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세력이 그 혁명을 담당한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상인 자본, 산업자본으로 전개되는 유럽 각국의 경제 발전과 그 생산관계의 변혁을 서술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지배자로서의 등장, 그리고 그것에 의한 근대적 대의제 국가의 확립, 정치적 의지의 중앙집권화 과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임금제에 의한 노동의 본질 변모, 반동주의자들도 낙담시키는 세계 시장의 국가 독자성을 빼앗는 세계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여러 관계의 변화에서, 하나의 “상품”으로서 나타나는 노동력의 존재로 논의가 발전해 간다. “폭력에 의한 부르주아지의 전복”이라는 내용도 여기에 등장하지만, 여기서의 논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경쟁에 의한 고립화 대신, 협동(''Assoziation'')에 의한 혁명적 단결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3. 3. 제2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과업이 프롤레타리아의 목적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며, 프롤레타리아 주도의 공산사회를 만드는 것이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최고 목적이라고 밝혔다.[3]

제2장에서는 공산주의 운동의 목적과 성격을 규명한다. 이는 정의자 동맹을 바부프적인 것에서 마르크스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려는 초기 목표를 고려하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모든 재화를 공유하고 완전한 평등을 추구하는 바부프적인 공산주의(오늘날에도 공산주의는 이러한 것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를 "야만적인 평등화"(제3장)로 비판하고,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를 목표로 삼았다.

부르주아적 소유에 대해서는 "전제적인 침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소득세의 강력한 누진세, 상속권의 폐지, 망명 귀족의 재산 몰수, 토지와 은행, 공장 등의 국유화, 생산수단의 공유화, 농업공업의 융합, 아동 노동의 폐지, 무상 공교육 등을 예시로 들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지배 계급으로 조직화된 후에는 결국 스스로 계급 지배를 폐지하고, 국가 권력도 "정치적 성격을 잃게" 될 것이며,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공동체가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3. 4. 제3장: 사회주의 문헌과 공산주의 문헌

기독교 사회주의, 유토피아 사회주의 등 기존의 사이비적 사회주의 조류들을 비판하였다.

그가 논박한 사회주의의 조류는 크게 나누면 기독교 사회주의, 봉건적 사회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또는 보수적 사회주의, 사변적 사회주의이다.

이 장에서는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유럽에 존재했던 다양한 사회주의적 흐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당시에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자칭하는 것이 유행처럼 행해졌기 때문에, 다양한 학파가 존재했다. 주된 검토 및 비판의 대상은 제1절 c의 독일 진정한 사회주의이며, 모제스 헤스와 카를 그륀이 명시적으로 비판받는다.

또한,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제1절 b)와 공상적 사회주의(제3절. 생시몽, 푸리에, 프루동 등)에 대해 그 역사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그 한계가 비판적으로 논의된다.

3. 5. 제4장: 각종 반정부당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

공산당들의 기본적인 혁명 전략을 다루고 있는 제4장에서는, 각국 공산당의 혁명 전략과 국제적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공산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족쇄뿐이고 그들이 얻을 것은 전 세계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로 끝을 맺는다.[3]

제4장은 공산주의자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다른 정치 세력에 대해 취하는 정치적 입장을 다룬다. "한마디로 말해, 공산주의자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사회적·정치적 상태에 대한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부르주아지가 중심이 되는 운동일지라도 그것이 민주주의나 사회 발전에 부합한다면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즉, "독일이 부르주아 혁명의 전야에 있다"라고 전제한 후, 공산주의자는 독일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닌 부르주아 혁명을 전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문장은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의도와 신조를 숨기는 것을 경멸한다. 그들의 목적은 기존의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하는 것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공공연히 선언한다. 지배 계급이 공산주의 혁명 앞에 떨리도록. 프롤레타리아는 이 혁명에서 족쇄 외에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얻는 것은 세계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유명한 구절로 끝맺으며, 폭력 혁명을 당당하게 선언한다.[36]

4. 공산당 선언의 영향

《공산당 선언》은 출판 당시와 이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공산당 선언》은 발표 직후 유럽에서 발생한 민중 봉기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당시의 혁명적 시대정신을 가장 급진적으로 드러낸 문건으로 평가받는다.[43] 프리드리히 엥겔스1871년 파리 코뮌이 《선언》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지만, "파리 코뮌이 《선언》의 정신적 자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평가했다. 1881년에는 《선언》의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한 독일 사회민주당이 국회의원 12명을 당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엥겔스는 이를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가 이룩한 가장 눈부신 업적"이라 칭하며, 《선언》을 "전체 사회주의 문헌 가운데 가장 널리 유포되고 가장 국제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44]

1882년 《선언》의 러시아어 개정판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러시아에서의 혁명 가능성을 언급했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레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권력이 이양되면서 마르크스가 《선언》에서 예견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실현되지 않았다. 독일에서도 1919년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한 봉기가 발생했으나 진압되었다.[45]

1960년대1970년대 냉전 시기에 《공산당 선언》은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확산되었다. 이 시기 《선언》은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는 강령이라기보다는 정치와 사회를 공부하기 위한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68혁명은 《선언》의 평등 이념이 복귀하고 확장된 것으로, 신좌파는 부르주아지의 정치, 경제적 착취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인종, 성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착취와 불평등에 저항했다.[46]

1870년대 초, 『공산당 선언』과 그 저자들은 부활을 경험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유설명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역할마르크스가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수행.
파리 코뮌 지지마르크스는 1871년 파리 코뮌을 지지하여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큰 명성을 얻었지만, 당국으로부터는 악명을 얻음.
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재판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지도자들의 반역 재판에서 검찰이 증거로 『공산당 선언』을 소리 내어 읽음.



1872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독일어판을 출판하면서, 초판 발행 이후 25년 동안 시대에 뒤떨어진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밝히는 서문을 썼다. 이 판은 또한 제목이 『공산당 선언』(Das Kommunistische Manifest)으로 축약된 최초의 판이었다. 1871년에서 1873년 사이에 『공산당 선언』은 6개 언어로 9개 이상의 판본으로 출판되었으며, 1871년 12월 30일에는 뉴욕시의 『우드헐 앤 클래플린 위클리』에서 처음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었다.[7]

그 후 40년 동안 유럽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사회민주당이 부상함에 따라, 『공산당 선언』도 30개 언어로 수백 개의 판본이 출판되면서 함께 부상했다. 1883년 마르크스가 사망한 후, 엥겔스는 1888년부터 1893년까지 5개 판본에 대한 서문을 제공했다. 여기에는 사무엘 무어가 번역하고 엥겔스가 승인한 1888년 영어판도 포함되어 있으며, 엥겔스는 본문 전체에 주석을 달았다. 이것은 그 이후로 표준 영어판으로 사용되어 왔다.[8]

주요 영향력 지역은 동쪽의 러시아에서 서쪽의 프랑스까지 이어지는 유럽의 "중앙 지역"이었다. 이 책의 첫 번째 중국어판은 1905년 러시아 혁명 후 통맹회 신문에서 주지신이 번역했다.[9]

20세기 후반과 21세기의 많은 저술가들은 『공산당 선언』의 지속적인 관련성에 대해 논평했다. 피터 오스본은 이 책이 "19세기에 쓰인 가장 영향력 있는 단일 저술"이라고 주장했다.[12] 알렉스 칼리니코스는 "이것은 실로 21세기를 위한 선언입니다"라고 말했다.[15]

2013년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 유산 사업에 등재되었다.[24]

4. 1. 세계적 영향

《공산당 선언》은 발표 직후 유럽에서 발생한 민중 봉기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당시의 혁명적 시대정신을 가장 급진적으로 드러낸 문건으로 평가받는다.[43] 1871년 파리 코뮌은 《선언》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지만,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파리 코뮌이 《선언》의 정신적 자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평가했다. 파리 코뮌은 노동자 계급이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을 수립한 세계 역사상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연습이었다.[44] 1881년, 《선언》의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한 독일 사회민주당은 국회의원 12명을 당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고, 엥겔스는 이를 "프롤레타리아가 이룩한 가장 눈부신 업적"이라 칭하며, 《선언》을 "전체 사회주의 문헌 가운데 가장 널리 유포되고 가장 국제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44]

1882년 《선언》의 러시아어 개정판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러시아에서의 혁명 가능성을 언급했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레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권력이 이양되면서 마르크스가 《선언》에서 예견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실현되지 않았다. 독일에서도 1919년,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한 봉기가 발생했으나 진압되었다.[45]

1960년대1970년대 냉전 시기에 《공산당 선언》은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확산되었다. 이 시기 《선언》은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는 강령이라기보다는 정치와 사회를 공부하기 위한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68혁명은 《선언》의 평등 이념이 복귀하고 확장된 것으로, 신좌파는 부르주아지의 정치, 경제적 착취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인종, 성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착취와 불평등에 저항했다.[46]

1870년대 초, 『공산당 선언』과 그 저자들은 운명의 부활을 경험했는데, 홉스봄은 그 이유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이유설명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역할마르크스가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수행.
파리 코뮌 지지마르크스는 1871년 파리 코뮌을 지지하여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큰 명성을 얻었지만, 당국으로부터는 악명을 얻음.
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재판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지도자들의 반역 재판에서 검찰이 증거로 『공산당 선언』을 소리 내어 읽음.



1872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독일어판을 출판하면서, 초판 발행 이후 25년 동안 시대에 뒤떨어진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밝히는 서문을 썼다. 이 판은 또한 제목이 『공산당 선언』(Das Kommunistische Manifest)으로 축약된 최초의 판이었다. 1871년에서 1873년 사이에 『공산당 선언』은 6개 언어로 9개 이상의 판본으로 출판되었으며, 1871년 12월 30일에는 뉴욕시의 『우드헐 앤 클래플린 위클리』에서 처음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었다.[7]

그 후 40년 동안 유럽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사회민주당이 부상함에 따라, 『공산당 선언』도 30개 언어로 수백 개의 판본이 출판되면서 함께 부상했다. 1883년 마르크스가 사망한 후, 엥겔스는 1888년부터 1893년까지 5개 판본에 대한 서문을 제공했다. 여기에는 사무엘 무어가 번역하고 엥겔스가 승인한 1888년 영어판도 포함되어 있으며, 엥겔스는 본문 전체에 주석을 달았다. 이것은 그 이후로 표준 영어판으로 사용되어 왔다.[8]

주요 영향력 지역은 동쪽의 러시아에서 서쪽의 프랑스까지 이어지는 유럽의 "중앙 지역"이었다. 이 책의 첫 번째 중국어판은 1905년 러시아 혁명 후 통맹회 신문에서 주지신이 번역했다.[9] 『공산당 선언』의 이러한 불균일한 지리적 확산은 특정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 발전과 그곳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의 인기 정도를 반영했다.

4. 2. 한국에 미친 영향

대한민국에서 출판된 《공산당 선언》 번역본 및 해석본으로는 남경태의 《공산당 선언》(백산서당), 강유원의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뿌리와이파리), 박찬종의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운동 공산주의 선언》(아이세움) 등이 있다.[43]

5. 비판과 논쟁

《공산당 선언》은 출판 이후 많은 비판과 논쟁에 직면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도 여러 저술가들이 이 선언의 지속적인 관련성에 대해 논평했다. 피터 오스본은 이 책이 "19세기에 쓰인 가장 영향력 있는 단일 저술"이라고 주장했다.[12] 학자 존 레인스는 "오늘날 이 자본주의 혁명은 지구의 가장 먼 곳까지 도달했습니다. 돈이라는 도구는 새로운 세계 시장과 어디에나 있는 쇼핑몰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150년도 더 전에 쓰인 《공산당 선언》을 읽어보면 마르크스가 이 모든 것을 예견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13] 크리스 하먼은 "이 책의 산문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그 사회의 기원, 그리고 그 사회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강렬한 힘이 있습니다."라고 평가했다.[14] 알렉스 칼리니코스는 "이것은 실로 21세기를 위한 선언입니다"라고 말했다.[15]

반면, 수정주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개혁주의 사회주의자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젊은 시절에 쓴 《공산당 선언》에서 보여지는 "미숙한"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그가 반대한 폭력적인 블랑키즘적 경향을 비판했다. 그는 마르크스가 후기에 민주 사회에서 입법 개혁을 통해 특정 상황 하에서 평화적인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 "성숙한"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했다.[17][18] 베른슈타인은 《공산당 선언》에서 주장하는 거대하고 동질적인 노동 계급은 존재하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다수가 등장한다는 주장과는 달리 중산층이 자본주의 하에서 성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지 보이어는 《공산당 선언》을 "매우 시대적인 작품이며, 소위 '굶주린' 1840년대의 문서"라고 묘사했다.[20]

할 드레이퍼는 중산층에 대한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반박하며, 《공산당 선언》은 사실 이 계급의 개별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프롤레타리아화되고 있지만, 이 계급은 '점점 더 파산한 상태로 계속 존재한다'고 언급하고 있음을 지적했다.[21]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 선언》에서 시골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에 주목했다. 그러나 에릭 홉스봄이 지적했듯이, 여기서 사용된 독일어 "dem Idiotismus des Landlebens entrissen"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좁은 시야" 또는 "더 넓은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며, 이는 그리스어 ''idiotes''(사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의 원래 의미를 반영한 것이다.[23]

2013년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 유산 사업에 등재되었다.[24]

5. 1. 폭력 혁명 옹호 논란

마르크스주의 관련 문헌 중 가장 널리 읽힌 문헌 중 하나인 《공산당 선언》은 반대자와 비판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중 가장 많은 비판 중 하나는 "공산주의자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의 폭력적인 전복을 통해서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언한다"는 서술에 대한 것이다.

또한, 바부프의 재산 공유제를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의 구별 없이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라는 슬로건과 함께 "사유재산의 폐지"라는 목표를 내걸었다는 점은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빼앗는다"는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본서에는 선언에서 사유재산의 폐지는 곧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를 의미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쓰여 있다).

마르크스주의 측에서는, 그 서문에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에서든 모든 나라의 민주주의 정당과의 동맹과 협조에 힘쓸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폭력혁명은 유럽의 의회 상황을 반영한 것이며, 마르크스 등은 후년에 이러한 견해를 버렸다는 점[37][38] 등이 반박으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정의자 동맹과 공산주의자 동맹 모두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실제 방법론으로는 마르크스, 샤퍼, 바이트링 모두 일시적으로나마 폭력혁명 노선을 취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특히 가장 명확하게 끝까지 폭력혁명 노선을 고수한 동맹 관계자는 바이트링이었다.

5. 2. 사유재산 폐지 문제

본서는 마르크스주의 관련 문헌 중 가장 널리 읽힌 문헌 중 하나이며, 반대자와 비판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중 하나는 "공산주의자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의 폭력적인 전복을 통해서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언한다"는 서술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바부프의 재산 공유제를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의 구별 없이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라는 슬로건과 함께 "사유재산의 폐지"라는 목표를 내걸었다는 점은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빼앗는다"는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37][38] 하지만 본서에는 사유재산의 폐지가 곧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를 의미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5. 3. 기타 비판

마르크스주의 관련 문헌 중 가장 널리 읽힌 문헌 중 하나인 본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의 폭력적인 전복을 통해서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언한다"는 구절은 폭력 혁명에 대한 비판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37][38]

또한,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을 구별하지 않고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라는 슬로건과 함께 "사유재산의 폐지"라는 목표를 내걸었다는 점은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빼앗는다"는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본서에는 사유재산의 폐지가 곧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를 의미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 측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에서든 모든 나라의 민주주의 정당과의 동맹과 협조에 힘쓸 것이다'"라는 서문의 내용과, 폭력혁명은 당시 유럽의 의회 상황을 반영한 것이며, 마르크스 등은 후년에 이러한 견해를 버렸다는 점[37][38] 등을 들어 반박한다.

하지만, 정의자 동맹과 공산주의자 동맹 모두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마르크스, 샤퍼, 바이트링 모두 일시적으로나마 폭력혁명 노선을 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바이트링은 가장 명확하게 끝까지 폭력혁명 노선을 고수했던 인물이었다.

6. 현대적 의의

20세기 후반과 21세기의 많은 저술가들은 『공산당 선언』의 지속적인 관련성에 대해 논평했다.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 특별호에서 피터 오스본은 이 책이 "19세기에 쓰인 가장 영향력 있는 단일 저술"이라고 주장했다.[12] 2002년 학자 존 레인스는 "오늘날 이 자본주의 혁명은 지구의 가장 먼 곳까지 도달했습니다. 돈이라는 도구는 새로운 세계 시장과 어디에나 있는 쇼핑몰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150년도 더 전에 쓰인 『공산당 선언』을 읽어보면 마르크스가 이 모든 것을 예견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13] 2003년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은 "이 책의 산문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그 사회의 기원, 그리고 그 사회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강렬한 힘이 있습니다. 이 책은 주류 경제학자와 사회학자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오늘날 반복되는 전쟁과 경제 위기, 한편으로는 수억 명의 굶주림과 다른 한편으로는 '과잉생산'의 세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세계화에 관한 최근 저술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구절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14]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편집자인 알렉스 칼리니코스는 2010년에 "이것은 실로 21세기를 위한 선언입니다"라고 말했다.[15] 『런던 이브닝 스탠다드』(The London Evening Standard)에 기고한 앤드류 니더는 베르소 북스(Verso Books)가 에릭 홉스봄의 서문과 함께 2012년에 재출판한 『공산당 선언』을 오웬 존스의 저서 『차브스: 노동 계급의 악마화』(Chavs: The Demonization of the Working Class)와 제이슨 바커의 다큐멘터리 『마르크스 재장전』(Marx Reloaded)의 출판을 포함한 좌파 테마의 아이디어 부활의 일부로 언급했다.[16]

소비에트 연방 우표 『공산당 선언』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 우표


반대로, 수정주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개혁주의 사회주의자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같은 비평가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젊은 시절에 쓴 『공산당 선언』에서 보여지는 "미숙한"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그가 반대한 폭력적인 블랑키즘적 경향, 그리고 그가 지지한 후기 "성숙한"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했다.[17] 여기서 후자는 마르크스가 후기에 민주 사회에서 입법 개혁을 통해 특정 상황 하에서 평화적인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의미한다.[18] 베른슈타인은 『공산당 선언』에서 주장하는 거대하고 동질적인 노동 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다수가 등장한다는 주장과는 달리 중산층이 자본주의 하에서 성장하고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선언했다. 마르크스 자신은 후기에 자신의 저서 『잉여가치론』(1863)에서 소부르주아 계급이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후기 저술의 모호성 때문에 마르크스가 이 오류를 인정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19] 조지 보이어는 『공산당 선언』을 "매우 시대적인 작품이며, 소위 '굶주린' 1840년대의 문서"라고 묘사했다.[20]

할 드레이퍼는 중산층에 대한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반박하며, 『공산당 선언』은 사실 이 계급의 개별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프롤레타리아화되고 있지만, 이 계급은 '점점 더 파산한 상태로 계속 존재한다'고 언급하고 있음을 지적했다.[21]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 선언』에서 시골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에 주목했다. "부르주아는 [...] 모든 민족을 [...] 문명으로 이끌었다[.] [...]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고 [...] 따라서 상당한 인구를 시골 생활의 어리석음[sic]에서 구출했다."[22] 그러나 에릭 홉스봄이 지적했듯이, 마르크스가 이 시기에 농촌 환경에 대한 경멸과 무지를 공유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실제적이고 분석적으로 더 흥미로운 독일어 구절("dem Idiotismus des Landlebens entrissen")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좁은 시야" 또는 "시골 사람들이 살았던 더 넓은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했다. 그것은 "바보" 또는 "바보스러움"의 현재 의미가 파생된 그리스어 ''idiotes''의 원래 의미, 즉 "더 넓은 공동체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사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을 반영했다.[23] 184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그리고 마르크스와 달리 고전 교육을 받지 않은 회원들의 운동에서 원래의 의미는 상실되었고 오독되었다.

2013년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 유산 사업에 등재되었다.[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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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서적 공산당선언 그린비
[44] 서적 공산당선언
[45] 서적 공산당선언
[46] 서적 공산당선언
[47] 기타
[48] 서적 공산당선언 백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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